모헨조 다로 다시보기

영화정보
  • 모헨조 다로 다시보기
  • 액션
  • 2016
  • 인도
  • 아슈토쉬 고와리커
예고편
스틸컷
모헨조 다로 다시보기
감상평 1
황하문명에 데한것 간추려서 좀 알려주세요~~~ 모헨조 다로
감상평 2
황하문명은 중국의 황하강에서 탄생당시의 국가는 은나라(?)갑골문자 발달 모르겠네요 ㅋㅋㅋ;;
감상평 3
황하문명  중국 황허강 중·하류와 그 지류유역에서 발생한 문명. 세계 제4대 문명발상지의 하나로, 강본류유역의 잦은 홍수로 인해 지류에 임한 구릉지를 중심으로 문명이 처음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황허강 최대 지류인 웨이허강[渭河(위하)] 남쪽 산시성[陜西省(섬서성)] 란톈현[藍田縣(남전현)]에서는 란톈원인이 발견되어 현재 중국 최고(最古)인류로 알려져 있다. 황허문명의 구석기시대 초기 유적은 주로 시안[西安(서안)] 동쪽, 뤄양[洛陽(낙양)]의 서쪽에 있는 웨이허강으로부터 황허강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있고, 중기 유적은 펀허강[汾河(분하)]유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후기 유적은 윈난[雲南(운남)]·광시[廣西(광서)]에 비교적 많고 웨이허강유역과 황허강 본류로부터 산둥[山東(산동)]의 구릉에 걸친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신석기시대 초기 문화인 허난성[河南省(하남성)] 페이리강문화, 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 츠산문화[磁山文化(자산문화)] 등의 두 문화는 연대가 거의 같고, 내용도 비슷한 계통의 농경문화를 이룬다. 유적은 각각 강에 면한 대지에 있고 사람들은 취락을 이루어 정착생활을 하였으나 그 규모는 작았다. 주거유적은 원형이나 사각형의 반지하식 수혈(竪穴)로 그 주위에는 곡물용 저장구멍이 만들어졌으며 가축도 사육되었다. 토기는 진흙과 모래가 섞인 홍도(紅陶)이지만 채도는 볼 수 없으며 연대는 탄소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 BC 5935∼BC 5195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황허강 중류역을 중심으로 양사오문화[仰韶文化(앙소문화)]가 일어났다. 이 문화는 BC 5000∼BC 2500년에 걸쳐 있으며 산시성의 반포[半坡(반파)] 유적과 허난성의 먀오디거우[廟底溝(묘저구)] 유적이 대표적이다. 이때는 완전한 정주생활을 영위하였고, 조·수수 등의 곡물 외에 채소도 재배하였으며, 개·돼지 등 가축사육과 병행하여 수렵·어로도 행하여졌다. 취락은 규모가 컸으며 환호(環濠)를 둘러 그 안쪽에서 살았고 바깥쪽에 요업장·공공묘지가 있었다. 사회조직은 씨족제였으나 여성중심의 매장법으로 미루어 모계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토기는 세니홍도(細泥紅陶)와 모래가 섞인 회도(灰陶)가 많이 만들어졌고 물고기무늬 등을 그린 채도는 양사오문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유적의 분포범위는 매우 넓어 산시성 남부, 허난성 서부 일대의 황투고원[黃土高原(황토고원)]을 중심으로 동쪽은 허난성 동부와 허베이성 남부, 남쪽은 한수이강[漢水(한수)] 중류역, 서쪽은 웨이수이강 상류 및 황허강 중류의 타오장강 유역, 북쪽은 오르도스(Ordos;鄂爾多斯) 부근까지 이른다. 한편 중국 신석기문화는 황허강을 중심으로 한 양사오문화 외에도 양쯔강[揚子江(양자강)] 하류의 허무두문화, 산둥 방면의 다원커우문화[大汶口文化(대문구문화)]가 발달하여 중국의 선사문화가 다양성을 가지고 다원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BC 2500∼BC 1700년 양사오문화를 이어 보다 넓은 지역에 이르는 룽산문화[龍山文化(용산문화)]가 번성하였다. 토기는 녹로를 사용하여 치밀하고 얇게 잘 연마된 흑도(黑陶)가 만들어졌는데, 종류로 솥 등 각종 삼족기(三足器)가 있으며 그 뒤 계속되는 도기나 청동기의 기본적 모양이 모두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동물뼈를 가열하여 생기는 균열을 보고 미래를 점치는 골점이 행해졌고, 사회조직은 씨족제도로서 부계제였다. 간석기[磨製石器(마제석기)]는 더욱 정교해졌고, 돌이나 조개껍데기로 만든 낫, 뼈나 나무로 만든 가래 등 새로운 농기구가 등장하여 농업경제가 두드러지게 발전하였다. 또한 청동이 사용되고 구슬제품도 많이 나타났다. 이 시대에는 사회구조도 변하여 왕조가 건설되었는데, 이 시기에 하문화(夏文化)가 나타났으나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하나라는 처음 황허강 중류역의 허난성 서부 방면을 점거하고 차츰 활동범위를 황허강 하류역으로 확대해나갔다. 사회적으로는 원시씨족제가 무너지고 계급사회 발전단계에 있었으며 생산용구는 룽산문화 말기부터 계속되는 석기·골기가 중심이지만 청동기도 등장하고 있다. 허난성 옌스현[偃師縣(언사현)] 얼리터우[二里頭(이리두)] 유적 등에는 이 시대 판축(版築)으로 만들어진 성벽과 궁전이 남아 있다. 뒤이어 나타난 은(殷)나라는 전시대에 비해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사회는 왕족이나 귀족 등 지배계급과 시민이 있었고 최하층의 노예가 존재하는 노예제사회로서, 많은 피정복민의 노예가 생산에 종사하였다. 허난성 안양시[安陽市(안양시)]의 은허(殷墟)는 제20대 반경(盤庚)부터 마지막 제31대 주왕(紂王)까지 약 300년에 걸친 왕조 도읍의 폐허지로, 이곳에서 발견된 거대한 왕묘에는 수백 명에 이르는 순장자와 많은 부장품이 함께 출토되고 있어 당시 왕실의 강대한 권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이미 태음·태양력에 의한 역법(曆法)이 성립되었고 간지(干支)도 사용되었다. 석공·도공(陶工)·동공(銅工) 등 전문적 공인이 있었고, 특히 주동(鑄銅) 기술은 고도로 발달하여 정교한 것이 많이 제작되었다. BC 11세기 중엽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주(周)나라는 은나라의 문화를 이어받았고, 드넓은 영토를 봉건제도로써 분할, 통치하였다. 봉건제가 쇠퇴한 BC 770년 무렵 도읍을 동쪽으로 옮겨 이때부터 동주시대(東周時代)가 열리는데, 이 시대의 전반을 춘추시대, 후반을 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걸쳐 철제 농구·공구가 나타나 효율적인 농경이 이루어지고 농업생산이 두드러지게 성장하였다. BC 3세기 무렵 진(秦)·한(漢)나라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성립, 오랜 전통을 지닌 황허문명이 중국 전체로 확산되어 평균화된 중국문명권이 나타나게 되었다. 황허문명은 철기가 거의 완전하게 보급된 전한(前漢)까지를 가리키며, 이때까지 중국문화의 중심지대는 황허유역 방면이었으며 그 뒤 계속되는 중국 문화의 모체가 되었다. 인더스 문명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의 하라파, 모헨조다로 등에 도시 문명 발생했다. 이 도시들은 도시계획을 갖추고 있었다. 공중목욕탕 시설과 벽돌주택,곡물 창고와 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인더스 문명의 도시들에서 발견된 유적에는 철기는 볼 수 없다. 즉 이 문명은 청동기시대의 문명이다. 하지만 이 문명의 정확한 연대는 말하기 힘들다. 학자들마다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마샬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B.C. 3000년 경을 문명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문명은 대략 1000년정도 지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연대 측정은 인더스문명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보다 조금 늦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힌두교의 시바(Shiva)신앙으로 자리잡은 초기 신들의 모습이 테라코타로 남겨져 있다는 가설도를 보면, 인더스 문명에도 확실하진 않지만 이후 인도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신앙의 초기단계가 담겨 있었던 것을 알수있다. 고대 인도인들이 숭배했던 여신상이나 요가 자세를 취한 수행자의 모습이 인장과 조각상으로 수없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문명의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인더스 문명은 높은 수준의 발전을 보였지만 B.C. 1700 - 1500년 경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중 유력한 설을 보면,
때문에 강의 범람으로 문명이 파괴되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모헨조 다로   ①천재 지변에 의한 멸망. 큰 강에 인접하고 있는 도시기
  ②환경의 변화. 이것은 기후가 변화하여, 곡물 경작에 이상이 생겨 멸망했다는 설이다.
  ③외적의 침입. 가장 유력한 설인다.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아족이 인도에 들어온 시기와 인더스 문명이 멸망한 시기가 비슷해서 신빙성을 인정 받은 설이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으로 그 큰 문명이 한 번에 망했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이고, 학자에 따라서는 인더스 문명의 멸망시기와 아리아족이 인도에 들어온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④황폐화
여름이 지난 10월 말쯤 모헨조다로와 하랍빠 그리고 그외의 몇 몇 유적지들을 둘러보면, 거의 사막에 가까울 정도의 황무지이다. 강물은 다 말라 비틀어져 있고 기온은 한여름이 아닌데도 50도 안팎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런 화려한 도시가 발생하였을까 ? 어떻게 그런 도시를 뒷받침할만큼의 풍부한 농경이 이루어졌을까라는 의문이 저절로 든다. 그렇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당시엔 이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사막의 확장으로 인해 토지는 황폐화되고, 강물은 마르고, 숲은 사라지고, 날은 더워지고, 농사는 더 이상 지을 수은 없고 ... 그들이 가꾸고 꿈꾸던 땅의 풍요로움이 깨지는 날, 그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STYLE> 모헨조 다로
사회적 배경
도시특징인 질서정연한 도시계획
 -벽돌로 쌓은 성벽
 -거리가 곧게 정비되어있음
2,3층집 모헨조 다로  -기와집과
 -공동목욕탕,곡물창고,제분장,시장,하수도 시설 등 발굴
모헨조다로의 질서정연한 모습
을 보면 인더스사회가 동일한 삶의형태와 일정한 도구를 사용한 고도로 정비되고 통합된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배자를 위한 시설이나 신관들이 사용하는 소욕장과 일반시민들이 사용하는 대욕장이 나눠져있고, 통치권과 관련된 정교일치 사회의 수장으로 보이는 석상을 통해 모헨조다르 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소수의 엘리트 사제 지배층이 존재했으며 모헨조다르에 있는 아파트식 건물이 일반시민의 것이 아닌 노동자의 아파트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면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신분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모헨조다로의 도시계획
교역에 있어서 채도, 금은 세공품, 구리, 청동제식기 등의 분포로 미루어 그들이 해상과 육상으로 서아시아 지역, 특히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교역의 폭을 넓혔으며, 멀리 나일강 유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자연환경범위 모헨조 다로 그리고 인더스문명은 신전만이 발달하고 국왕과 소수의 지배 엘리트 및 대중 사이에 계급의식과 경제분화가 뚜렷했던 특성을 갖고있는 메소포타미아문명에 비해 민가가 발달하고, 전체도시민이 평준화된 풍요로운 생활과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문화를 소유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문명은 뻔잡(Punjab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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